살피건대, 김노정(金魯定) 집에서고찰한 『씨족원류(氏族源流)』, 『성범총록(姓苑叢録)』, 『만성보(萬姓譜)』 등에는모두 아주씨(鵝洲氏)는 평산(出自平山)으로부터 나왔다고 하였으니 세대가 (평산에서) 계승되었음을 분명히 근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산보(平山譜)의분파처(分派處)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또 다른 믿을 만한서적을 참고하여 증명할 수 없는 까닭으로 감히 연계되었다고 바로 쓸 수는 없고, 아직은 다만 책 끝에붙여 전해옴의 의심스러운 사례로 표시해 놓는다.
1)곽숭도(郭崇鞱)는오대(五代) 때의 후당(後唐) 사람이었다. 그가 추밀사(樞密使)가 되어 용사(用事)할때 재상(宰相) 두로혁(豆盧革) 등이 다 그에게 아부하였다. 하루는 곽숭도에게 “분양왕(汾陽王 : 당 나라 곽자의(郭子儀)의 봉호(封號))은 본시태원(太原) 출신으로 화음(華陰)에 이주(移住)하였고, 공(公: 곽숭도)은 대대로 안문(雁門)에살았는데, 어떻게 분양왕의 지파(枝派)가 되는가?”라고 묻자, 그는“난리를 만나 보첩(譜牒)을 유실하였다. 선인(先人)의 말에 의하면, 본인은 분양왕의 4대손이 된다.”라고하였다. 《舊五代史 卷57》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을해수보시(乙亥修譜時:1935년으로 추정됨)에 몇 위(位)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700여년 각 집에 전해온 세첩(世牒)을 따르지 아니하고 다만 화해사전(華海師傳: 신언직이 변론한 위서僞書)과김노정(金魯定) 집의 별지에 붙여 쓴 글(別紙書付)과 장(章)을 넘어 사이의 기록(越章間録)과 빈 종이에 작은 글씨로쓴 『성원총록(姓苑叢錄)』 등 책을 바로 신뢰하여 익휴(益休)를 시조 영미(英美)의 위에 두었다.
신군평(申君平)은 평주(平州) 사람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충숙왕(忠肅王) 때 대관(臺官)이 되었다. 그때에 권세 있고 벼슬이 높은 사람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얻은 자가 수 백 명이나 되었다. 그 중 최완(崔琬)이라는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부친상을 숨기고 과거에 응시한 적이 있었으며,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수주참군(水州參軍)이 되었으나추문이 있어서 동년(同年)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그는〉 또 권세가에게 의지하여 성균학록(成均學錄)이 되었으나 신군평은 모두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또한 정승 강융(姜融)과 찬성(贊成) 채하중(蔡河中), 회의군(懷義君) 최노성(崔老星), 좌대언(左代言) 조신경(曹莘卿), 원윤(元尹) 신시용(申時用), 지평(持平) 윤현(尹賢)의 고신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의 뜻을 거슬려서 파직되었으므로조야(朝野)에서 모두 애석해 하였다. 다음날 장령(掌令) 박원계(朴元桂)가 〈그 고신에〉 서명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비겁함을비웃었다.
〈신군평은〉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에나주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나이가 90살인데다 병들어 있었으므로 신군평은 굳이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공민왕〉 4년(1355)에 좌대언(左代言)에 임명되었는데, 왕이 의성창(義成倉)의 관리인 전이도(全以道)와우유길(禹攸吉), 덕천창(德泉倉)의 관리인 최운고(崔云固)와신천명(申天命)을 파직할 것을 명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우유길은 전객시승(典客寺丞)으로 임명되었는데, 우유길이 신군평의 동서[友壻]였으므로 전이도 등이 자못 시비를 하였다. 신군평은 이것을 싫어해서 왕에게 아뢰고 임명 명단[除目]을 회수해서 우유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뒤에 왕이 승직(僧職)을 주려고 신군평을 불렀는데,신군평은 마침 숙직을 하고 있다가 병을 핑계하고 사양하였으며, 뒤에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였다.